대상 없이 욕망하기



정결케 한다는 것은 원하는 대상과 탐욕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욕망의 원천으로 파고들어서 에너지로부터 그 대상을 빼앗을 것. 이때 욕망은 에너지로서 참이다. 거짓인 것은 대상이다. 그러나 욕망과 그 대상을 분리시키면 마음 속에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찾아온다.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정확히 우리가 원하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죽은) 이러이러한 존재를 원한다는 것은, 어떤 개별적이고 제한된 존재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그것은 죽게 마련인 인간이며, 우리는 바로 이 존재를, …였으며 …했던, 등등, 요컨대 어느 날 어느 시각에 죽은, 존재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 죽은 — 그를 소유하고 있다.

돈을 원한다는 것은, (제도로서의) 어떤 화폐를 원하는 것인데, 이는 이러저러한 조건 하에서만 얻을 수 있는 무엇이며, 따라서 우리는 …인 한에서만 그것을 원한다. 그런데, 그러한 한에서,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고통, 빈자리는 그러한 경우 욕망의 대상의 존재 양식이다. 비실재의 장막을 걷어내면 그것이 우리에게 그렇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을 알게 되면,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



누군가를 잃는 것: 죽은 자가, 부재하는 자가, 이제 상상이, 거짓이 되었다는 것이 아프다. 그러나 우리가 그에 대해 갖는 욕망은 상상이 아니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것. 거기에 상상적이지 않은 욕망이 있다. 굶주림: 우리는 음식을 상상하지만, 굶주림 자체는 실제다: 굶주림을 포착할 것. 죽은 자의 존재는 상상이지만 그의 부재는 실제다; 부재는 이제부터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빈자리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채워 줄 초자연적인 빵을 기대하는 것은 신을 시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해서도 안 된다.



빈자리는 지고의 충만함이나, 인간이 그것을 알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자신도 얼마 동안 그것을 완전히 몰랐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나의 어떤 부분은 그것을 알아야 하지만, 나머지는 아니다. 나머지 부분들이 그것을 저열한 방식으로 안다면, 더 이상 빈자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비참함을 모두 겪었다, 죄를 제외하고. 그러나 그는 인간의 죄를 가능케 하는 모든 것을 겪었다. 인간의 죄를 가능케 하는 것은 빈자리이다. 모든 죄는 빈자리를 채우려는 시도이다. 그리하여 오점으로 가득한 내 삶이 완전하게 순결한 그의 삶과 가까이 있으며, 훨씬 더 타락한 삶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낮은 곳까지 떨어지더라도, 나는 그에게서 대단히 멀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쓰러졌을 때,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알지 못하리라.



오랜 부재 끝에 재회한 친구와의 악수. 그것이 촉각에 있어서 쾌감인지 아니면 고통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눈 먼 사람이 지팡이 끝으로 사물을 직접 느끼듯이, 친구의 존재를 직접 느낀다. 어떤 것이든, 삶의 상황들도 마찬가지이며, 신 역시 그렇다.

이는 결코 고통에 대해 위안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복은 위안과 고통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팡이나 다른 매개물의 끝을 통한 사물의 지각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촉각과는 다른 것처럼, 그것은 다른 감각으로 느껴진다. 그 다른 감각은 온 영혼과 몸이 관여하는 학습을 통해 주의력을 이동시킴으로써 길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그들은 자기들의 보수를 받았습니다.”[각주:1] 보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감각 능력 속의 빈자리가 감각 능력 너머로 이끌어 준다.

성 베드로의 부인否認. 그리스도에게 한 말: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각주:2], 그것은 이미 그를 부인하는 것이다. 충실성의 원천을 은총이 아니라 자신 안에 상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는 뽑힌 자였기 때문에, 이 부인이 모든 사람들과 자신에게 명백히 드러났다. 다른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와 같은 호언장담을 하고 있는가 — 그리고 그들은 결코 깨닫지 못한다.

그리스도에게 신의를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텅 빈 상태에서의 충실성이었다. 나폴레옹에게 죽을 때까지 충성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이었다. 훗날 순교자들이 신의를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이었다. 이미 교회가, 지상의 약속들을 포함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한 것을 위해 죽을 수 있다. 약한 것을 위해서는 그럴 수 없으며, 혹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약하더라도 힘의 후광을 가진 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에게 충성하는 것은 빈 상태에서의 충성이 아니었다. 강한 것을 위해 죽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그 쓰라림을 덜어 낸다. 동시에, 모든 값어치도.



[…]




DÉSIRER SANS OBJET



La purification est la séparation du bien et de la convoitise.



Descendre à la source des désirs pour arracher l’énergie à son objet. C’est là que les désirs sont vrais en tant qu’énergie. C’est l’objet qui est faux. Mais arrachement indicible dans l’âme à la séparation d’un désir et de son objet.



Si l’on descend en soi-même, on trouve qu’on possède exactement ce qu’on désire.

Si l’on désire tel être (mort), on désire un être particulier, limité ; c’est donc nécessairement un mortel, et on désire cet être-là, cet être qui… que…, etc., bref, cet être qui est mort, tel jour, à telle heure. Et on l’a — mort.

Si on désire de l’argent, on désire une monnaie (institution), quelque chose qui ne peut être acquis que dans telle ou telle condition, donc on ne le désire que dans la mesure où… Or, dans cette mesure, on l’a.

La souffrance, le vide sont en de tels cas le mode d’existence des objets du désir. Qu’on écarte le voile d’irréalité et on verra qu’ils nous sont donnés ainsi.

Quand on le voit, on souffre encore, mais on est heureux.



[…]



Perdre quelqu’un : on souffre que le mort, l’absent soit devenu l’imaginaire, du faux. Mais le désir qu’on a de lui n’est pas imaginaire. Descendre en soi-même, où réside le désir qui n’est pas imaginaire. Faim : on imagine des nourritures, mais la faim elle-même est réelle : se saisir de la faim. La présence du mort est imaginaire mais son absence est bien réelle ; elle est désormais sa manière d’apparaître.



Il ne faut pas chercher le vide, car ce serait tenter Dieu que de compter sur le pain surnaturel pour le combler.

Il ne faut pas non plus le fuir.



Le vide est la plénitude suprême, mais l’homme n’a pas le droit de le savoir. La preuve est que le Christ lui-même l’a ignoré complètement, un moment. Une partie de moi doit le savoir, mais les autres non, car si elles le savaient à leur basse manière, il n’y aurait plus de vide.



Le Christ a eu toute la misère humaine, sauf le péché. Mais il a eu tout ce qui rend l’homme capable de péché. Ce qui rend l’homme capable de péché, c’est le vide. Tous les péchés sont des tentatives pour combler des vides. Ainsi ma vie pleine de souillures est proche de la sienne parfaitement pure, et de même pour les vies beaucoup plus basses. Si bas que je tombe, je ne m’éloignerai pas beaucoup de lui. Mais cela, si je tombe, je ne pourrai plus le savoir.



Poignée de main d’un ami revu après une longue absence. Je ne remarque même pas si c’est pour le sens du toucher un plaisir ou une douleur : comme l’aveugle sent directement les objets au bout de son bâton, je sens directement la présence de l’ami. De même les circonstances de la vie, quelles qu’elles soient, et Dieu.

Cela implique qu’il ne faut jamais chercher une consolation à la douleur. Car la félicité est au-delà du domaine de la consolation et de la douleur. Elle est perçue avec un autre sens, comme la perception des objets au bout d’un bâton ou d’un instrument est autre que le toucher proprement dit. Cet autre sens se forme par le déplacement de l’attention au moyen d’un apprentissage où l’âme tout entière et le corps participent.

C’est pourquoi dans l’Evangile : « Je vous dis que ceux-là ont reçu leur salaire. » Il ne faut pas de compensation. C’est le vide dans la sensibilité qui porte au-delà de la sensibilité.

Reniement de saint Pierre. Dire au Christ : je te resterai fidèle, c’est déjà le renier, car c’était supposer en soi et non dans la grâce la source de la fidélité. Heureusement, comme il était élu, ce reniement est devenu manifeste pour tous et pour lui. Chez combien d’autres, de telles vantardises s’accomplissent — et ils ne comprennent jamais.

Il était difficile d’être fidèle au Christ. C’était une fidélité à vide. Bien plus facile d’être fidèle jusqu’à la mort à Napoléon. Bien plus facile pour les martyrs, plus tard, d’être fidèles, car il y avait déjà l’Eglise, une force, avec des promesses temporelles. On meurt pour ce qui est fort, non pour ce qui est faible, ou du moins pour ce qui, étant momentanément faible, garde une auréole de force. La fidélité à Napoléon à Sainte-Hélène n’était pas une fidélité à vide. Mourir pour ce qui est fort fait perdre à la mort son amertume. Et, en même temps, tout son prix.



[…]

  1. [역주] 200주년 신약성서, 6:2, 6:5 또는 6:16에서, “[…]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보수를 받았습니다.” [본문으로]
  2. [역주] 공동번역 성서, 마태오 26:33에서 발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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