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과 복종, 발췌 II

2017. 9. 19. 10:10

“내가 굶주렸을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다.” 주님, 그것이 언제입니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이웃을 도와야 한다. 나라는 것이 사라짐으로써 그리스도가, 우리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매개를 이용하여, 이웃을 돕기를. 주인이 어느 불행한 자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라고 보낸 노예가 될 것. 도움은 주인에게서 오며, 불행한 자를 향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를 위해 고통받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위해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통받았다.

우리는 도움을 주는 노예에 대해 그가 주인을 위해 그 일을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불행한 자에게까지 가기 위해, 맨발로 못 위를 걷고, 고통을 겪는다 하더라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다시 말해: 저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신을 위해서’는 잘못된 표현이다. 신은 여격으로 놓일 수 없다.[각주:1]

신을 위해 이웃에게 갈 것이 아니라, 사수가 쏜 화살이 표적을 향해 날아가듯 신에 의해 이웃에게 떠밀려 갈 것.



미경지와 개간된 땅 사이의, 문제의 데이터와 해답 사이의, 백지와 시 사이의, 배고픈 불행한 자와 배불리 먹은 불행한 자 사이의 매개자가 되는 데 그칠 것.

모든 것에 있어서, 오직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 거저, 뜻밖에, 우리가 의도하는 일 없이, 마치 운명의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 순수한 기쁨이다. 더불어, 진정한 선은 절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것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보다 나은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 따라서 진정으로 선을 지향하는 노력은 끝맺을 수 없게 되어 있다; 길고 무익한 긴장이 결국 절망으로 끝나고, 우리가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때, 외부로부터, 경이로운 뜻밖의 것으로, 선물이 주어진다. 이때의 노력은 우리 안에 있는 거짓 충만함을 일부 파괴한 것이다. 신적인 빈자리, 충만함보다 더욱 충만한 것이, 우리 안에 와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신의 뜻.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자기 내면을 조용하게 하고, 모든 욕망들과, 모든 의견들을 침묵케 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온 영혼으로 말없이 생각했을 때, 의심의 여지 없이 해야 한다고 우리가 곧 느끼는 것이 (그럼에도, 어떤 점에서는 그것 역시 오류이겠지만) 신의 뜻이다. 우리가 그에게 빵을 달라고 하면 그가 돌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



초자연적으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기도에 있어서 어떠한 개별적인 것도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된다. 신은 보편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분명 그는 개별적인 것에 내려온다. 그는 내려왔으며, 창조 행위를 통해 내려온다; 마찬가지로 강생, 성찬, 계시, 등등. 그러나 그것은 하강의 움직임이지, 결코 상승이 아니며, 신의 움직임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이 규정하는 한에서만 그러한 관계를 수행할 수 있다. 우리의 역할은 보편적인 것을 향하는 것이다.

아마도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과 연결짓는 불가능성에 대한 베르제의 난점의 해답이 여기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상승 운동에 의해서는 불가능하지만, 하강 운동에 의해서는 가능하다.




« J’avais faim et vous m’avez secouru. » Quand donc, Seigneur ? Ils ne le savaient pas. Il ne faut pas le savoir.

Il ne faut pas secourir le prochain pour le Christ, mais par le Christ. Que le moi disparaisse de telle sorte que le Christ, au moyen de l’intermédiaire que constituent notre âme et notre corps, secoure le prochain. Etre l’esclave que son maître envoie porter tel secours à tel malheureux. Le secours vient du maître, mais il s’adresse au malheureux. Le Christ n’a pas souffert pour son Père. Il a souffert pour les hommes par la volonté du Père.

On ne peut pas dire de l’esclave qui va porter secours qu’il fait cela pour son maître. Il ne fait rien. Quand même pour aller jusqu’au malheureux, il marcherait sur des clous, pieds nus, alors il souffre, mais il ne fait rien. Car il est un esclave.

« Nous sommes des esclaves inutiles », c’est-à-dire : nous n’avons rien fait.

D’une manière générale, pour Dieu est une mauvaise expression. Dieu ne doit pas se mettre au datif.

Ne pas aller au prochain pour Dieu, mais être poussé par Dieu vers le prochain comme la flèche vers le but par l’archer.



N’être qu’un intermédiaire entre la terre inculte et le champ labouré, entre les données du problème et la solution, entre la page blanche et le poème, entre le malheureux qui a faim et le malheureux rassasié.

En toutes choses, seul ce qui nous vient du dehors, gratuitement, par surprise, comme un don du sort, sans que nous l’ayons cherché, est joie pure. Parallèlement, le bien réel ne peut venir que du dehors, jamais de notre effort. Nous ne pouvons en aucun cas fabriquer quelque chose qui soit meilleur que nous. Ainsi l’effort tendu véritablement vers le bien ne doit pas aboutir ; c’est après une tension longue et stérile qui se termine en désespoir, quand on n’attend plus rien, que de dehors, merveilleuse surprise, vient le don. Cet effort a été destructeur d’une partie de la fausse plénitude qui est en nous. Le vide divin, plus plein que la plénitude, est venu s’installer en nous.



La volonté de Dieu. Comment la connaître ? Si on fait le silence en soi, si on fait taire tous les désirs, toutes les opinions et qu’on pense avec amour, de toute son âme et sans paroles : « Que ta volonté soit faite », ce qu’on sent ensuite sans incertitude devoir faire (quand même, à certains égards, ce serait une erreur) est la volonté de Dieu. Car si on lui demande du pain, il ne donne pas des pierres.



[…]



Il ne faut avoir en vue dans la prière aucune chose particulière, à moins d’en avoir reçu surnaturellement l’inspiration. Car Dieu est l’être universel. Certes il descend dans le particulier. Il est descendu, il descend dans l’acte de la création ; de même l’Incarnation, l’Eucharistie, l’Inspiration, etc. Mais c’est un mouvement descendant, jamais montant, un mouvement de Dieu, non de nous. Nous ne pouvons opérer une telle liaison qu’autant que Dieu nous la dicte. Notre rôle est d’être tourné vers l’universel.

C’est peut-être là la solution de la difficulté de Berger sur l’impossibilité de relier le relatif à l’absolu. C’est impossible par un mouvement montant, mais c’est possible par un mouvement descendant.

  1. ‘여격’에 대해서는 문법적 설명이 필요하겠으나, 보류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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